이방인/하수은 당신으로부터 멀리 떠나갑니다 저도 당신도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당신으로부터 멀리 떠나옵니다 저를 당신을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한 곳에 머무르는 법 없이 철새처럼 부지런하면서도 허무하게 멀리로 멀리로 날아가다보면 낯선 땅 낯선 이들에 둘러싸여 우리는 원래 없었던 것처럼 한 철에만 만날 수 있는 신비한 이방인이 되어 평생을 그저 모르기만 하는 사...
심해/하수은 작은 속삭임이 물장구를 치듯 퍼져나간다. 팔할의 숨이 섞인 너의 귓속말은 마치 언어가 아닌 호흡으로의 소통을 원하는 것 같았다. 침대에 부스스한 모습으로 앉아있는 너에게는 아가미가 달려있다. 뻐끔뻐끔, 그렇게 내게 말을 걸며 기포 방울로 나의 뺨을 간질인다. 평범할 수 있었던 수많은 밤을 너는 아득한 심해로 끌고간다. 그곳에는 울어도 티나지 않...
광야/하수은 부둣가에 모여있는 해파리 떼는 말간 손으로 무엇을 집으려 하나 오늘 내가 자리한 창가에는 그 이들의 울음소리가 유독 가까우니 별들의 새카만 치맛자락 그 아래에 틈없이 뒤덮여 우리는 오늘 밤 파도와 함께 천천히 숨막혀 가는구나 언젠가 우주가 내 목을 놓아도 나는 켁켁대며 일어나는 법이 없겠지 아름다운 해파리 유영하는 물살과 흐릿하게 번진 수평선 ...
<물결> 초등학교 때 쓴 일기장에 남겨져 있던 선생님의 말씀이 기억난다. 수은아, 고디는 방언이야. 다슬기라고 써야 한단다. 그 코멘트에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모른다. 고디에게 다슬기라는 이름은 너무 세련된 거 아냐? 고디는 고디인데. 다슬기? 국어 교과서에라도 나올 것 같은 이름이잖아. 나는 여전히 다슬기가 낯설고 고디와 친하다. 읽는 이...
굳은살/하수은 그의 손가락 끝에는 딱딱한 굳은살이 흉하게 박혀있었다 그 중에서도 중지 손가락이 유달리 심했다 그가 나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 때 바로 옆에 있는데도 나에게 문자를 보낼 때 새로 지은 서툴고 사랑스러운 시를 보여줄 때 하나의 책을 함께 읽으며 글자를 손가락으로 훑을 때 세수하던 나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잡아주었을 때 나는 굳이 그의 손가락을 ...
유타로와 설화의 만남은 어쩌면 필연적이었던 걸지도 모른다. 설화는 테이프로 온 창문이 꽉 막힌 방 안에 누워 곰팡이 핀 초라한 천장을 바라보았다. 바로 옆에 누운 유타로에게 손을 잡아도 되냐 묻자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먼저 손을 내밀었다. 맞잡은 손바닥 사이로 열기가 스며들었다. 첫번째로 만났던 사람은 사십대 중반의 아저씨였다. 대체로 우울한 사람...
<끝눈> 그 해 3월 초에는 눈이 내렸다. 며칠간의 포근했던 날씨를 물리치고 별안간 찾아온 마지막 인사였다. 커다란 눈입자가 급한 기색도 없이 사뿐히 도시에 내려앉고 새하얀 인도에는 사람 발자국 하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파트 베란다의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뺀 채 오랫동안 그 정적을 지켜보았다. 숨을 내쉴 때마다 옅은 입김이 퍼져나갔다. 손에 ...
괭이 갈매기/하수은 바다와는 동떨어진 건조하고 딱딱한 내륙 지방 어쩌다가 그 미지의 해수와 친분을 맺게 되었는가 습하고 짠 수증기를 머금은 괭이 갈매기는 지켜야 할 부둣가를 훤히 비워넣고 나라로 나라로 여행을 떠나네 날개 한 켠에 잔뜩 묻혀놓은 고향의 눈물이 상공을 휘저으면 영문 모를 이들이 그리움에 취해 향수를 노래하는구나 괭이 갈매기 야옹하고 우는가 타...
옛날에 맴돌았던 귀갓길은 여전히 기억났다. 좁은 비포장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아래로는 바다가, 위로는 하늘이 보인다. 그 경계선 위를 나는 질리지도 않고 걸었다. 길목에는 주택과 주택 사이에 작은 흙 놀이터가 있었다. 비행기가 오면 언제든지 따라나설 수 있도록 우리만의 기지를 설치하고 놀았던 곳이었다. 갈 곳도 없고 날이 추워 계속 걷고 싶지도 않았던 나는 ...
주말에는 동생네 가족이 다 함께 집에 들렀다. 그 동안 잘 먹고 잘 지냈는지 못 본 사이에 동생의 얼굴에는 살이 쪄있었다. 한층 복스러워진 얼굴로 웃는 동생은 전보다 자연스러워 보였다. 선하게 생긴 처남은 붙임성도 좋다. 어머니, 아버지, 하면서 살갑게 말을 붙였다. 그 아래로는 조카들이 동생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줄지어 서 있었다. 어른들이 대화를 나누며 ...
꿈은 오래 품지 못했다. 잠깐 주어졌던 장난감처럼 천진난만한 추억을 남기고 흔적도 없이 앗아갔다. 시골 소년은 청년이 되어 배에 올랐다. 나라 이름을 대는 대신 고기 이름을 외웠다. 구름을 뚫는 대신 바다를 가로질렀다. 하늘을 비상하는 대신 해저로 잠겼다. 높이 날아가고 싶던 나는 바다의 보다 깊고 깊은 곳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모르는 심해가 나를 끌어당겼...
날이 스산하고 텁텁한 바닷바람만이 거세게 불었다. 해도 뜨지 않은 검고 고요한 시간 속에서 마룻바닥에 주저앉아 낡은 장화 안에 발을 들이밀었다. 작업복이 서로 스쳐 뽀득거리는 소리가 좁은 집에 울리고 한참 전부터 깨어 있던 어머니는 창문을 열어젖혀 하염없이 보이지 않는 바깥을 가리켰다. 괜찮아요. 일기예보도 조금 흐리다 말 거라고 했어. 대수롭지 않게 말하...
시와 소설을 씁니다. 더욱 상냥한 세상을 노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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